본 칼럼은 호주에서 살아가는데 있어 실제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가운데 이민자들이 호주 사회로의 순조로운 융합을 돕기 위한 뜻에서 기획되었다. 노인과 장애인 복지 서비스를 포함, 다양한 서비스 분야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관의 도움으로 이를 잘 극복한 사람들 그리고 자원 봉사자를 포함, 사랑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한인 커뮤니티에서 필요로 하는 내용들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번 칼럼에서는1980년대 이민 와서 오랫동안 가구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작품에 한국의 정신을 담아 온 카스 고객 김이기 선생님(가명)이 보내온 글을 한인 커뮤니티에 공유하고자 2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주).

, 2003년 작. 현재 한국 기원 소장 중. 우드터닝과 상감 기법으로 제작한 작품. 
, 2003년 작. 현재 한국 기원 소장 중. 우드터닝과 상감 기법으로 제작한 작품. 

“호주로 출국하시는 김xx 손님, 호주로 출국하시는 김xx 손님, 지금 즉시 출국장 입구 사무실로 와 주세요. 출국장 입구 사무실로 와 주세요.”

1984년 4월 3일. 내가 처음으로 호주  유학을 따나던 날 김포 공항이었다.

예기치 않은 호출에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잔뜩 긴장하며 출국장 입구 사무 실을 찾아 갔다. 바닥에는 내 가방이 놓여있고 웬 남자가 그 가방을 보고 있었다. 

“이 가방 손님 거 맞아요?”.  “예, 맞는데요.”. “안에 있는거 꺼내 보세요.”

나는 하나  하나 가방 속에서 물건들을 꺼내 바닥에 놓았다. 물건을 거의 다 꺼냈을때 꽹과리가 나왔다. “이게 뭡 니까?”. “꽹과리인데요.”

이걸 왜 가져 가세요?”.  “호주로 유학을 가는데 거기 사람들한테 한국 탈춤을 보여 주려구요.”. “좋은 일 하시네요, 이게 검색 엑스레이에 시커멓게 잡혀서 위험한 물건인가 해서 오시라 했습니다. 이제 됐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큰 꿈을 안고 타이페이, 홍콩을 거처 스물 여덟 시간의 비행 끝에 호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공부하는 동안 내 꽹과리는 시드니 대학과 교민 행사, 또한 여러 교회 행사에서 탈춤과 함께 그 멋진 소리를 선사 하였다.

공부는 멜번 빅토리아 대학의 목공예 디자인 학과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인테리어 디자인을 거쳐 대학원에서는 가구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는 아직 가구 디자인 학과가 없던 때라 열심히 공부해 한국에서 학생들을 잘 가르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대학원 과정에서 나를 지도해 줄 지도 교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지도 교수 중 한 사람은 중국 가구 디자인에 대해, 또 한 교수는 일본 가구 디자인을 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전공의 방향을 바꾸든지 아니면 나 혼자 자력으로 한국 가구 연구를 진행하든지 택일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선택이 아니라 꼭 돌아가야 하는 필수가 되었다. 한국에 돌아가서 한국 가구의 역사와 디자인을 정립하고 발전시켜 나가리라 다짐하였다.

, 한국 창호지, 나전, 킹빌리 호주 목재 사용한1991년 작. 개인 소장. 작가는 한국 전통가구를 현대적 디자인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에 주력해 왔다. 
, 한국 창호지, 나전, 킹빌리 호주 목재 사용한1991년 작. 개인 소장. 작가는 한국 전통가구를 현대적 디자인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에 주력해 왔다. 

 

꿈을 이루다

1995년 5월, 드디어 만 10년 만에 공부를 끝내게 되었다. 호주에서 다닌 대학만 4개 대학, 훌륭하다는 교수는 다 찾아 다니며 배웠다. 그리고 그동안 한국과 호주에서 전시회도 여러 번하며 한국 가구를 알리는 기회도 가졌다. 한국의 신문, 잡지, 그리고 TV 방송에서도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 당시만 해도 호주 영주권을 가지고 있던 상황에서는 영주권을 포기해야만 한국에서의 취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아내와 학교를 다니는 딸이 있는 상황에서 영주권 포기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 부분은 아직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러하듯 우리 부부도 열심히 살았다. 그런 우리 부부 의 모습을 중동 사람인 연세 드신 집 주인은 좋게 보았나 보다. 하루는 집 주인이 우리를 찾아 와서는 “저 앞에 게이트를 누가 고쳤 나요?”. “제가 고쳤는데요.”  “재료는 어디서 구했나요?”. “버닝스에서 구입했는데요” “재료 살 때 왜 나한테 얘기 안했어요, 다음부터는 얘기 해 주세요”.   주인은 우리가 십여 년을 넘게 그 집에 살았는데도 집세 올릴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손수 수리를 해 가며 내 집 처럼 살았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내 집 살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드니 집 값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니 우리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집 주인이 덩치 큰 아들을 데리고 우리 집을 방문했다. 

은인을 만나다

우리는 이제 이 집에서 나가 달라고 얘기하러 왔나 보다 생각하며 뒷 뜰에 주인과 함께 넷이 앉았다. 그리고 집 주인은 아들을 우리 부부에게 소개했다. “내 첫째 아들인데 파라마타에서 회계사로 일하고 있어요” 라며 주인은 이야기를 꺼냈다. “내 생각에는 당신들이 이 집을 사 주면 좋겠어요. 내 친구 한 사람이 이 집을 자기한테 팔라고 그 전부터 얘기해 왔는데 나는 이미 이 집을 살 사람이 따로 있다고 얘기했어요. 아마 아파트를 사는 것보다 이 집이 훨씬 나을 테니 당신들이 이 집을 사요.”  아들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들이 우리 부부를 설득하러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주인 부자의 말은 진지했다. 그 말을 듣던 아내가 난처한 듯 말했다. “우리는 지금 디포짓 자금이 없어요.” 그러자 주인은 “걱정 말아요. 디포짓 자금이 준비되면 그때 연락해요. 그 때까지 기다릴께요. 그리고 현 시세 가격에서 오만불을 깍아 줄께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생각지도 않은 시점에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우리 부부는 또 놀랐다. 어느 날 집 앞에 페인트 통이 한 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전화가 왔다. 집 주인이었다. “수리를 하고 집을 팔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천천히 틈날 때 칠해요. 그리고 그 전처럼 집을 직접 수리해 가며  잘 살기를 바래요.”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우리 부부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주인 집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가족과 같은 우애를 나누며 살았다. 지금은 그 분을 위해 매 주마다 감사 기도를 올린다.

(카스 칼럼은 유튜브 영상으로도 제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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