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밤새 비행기를 타고 이른 아침 시드니에 나타났다. 사진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등에 한 짐 그리고 어깨와 목에 카메라 장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호주 풍경을 하나라도 더 담고 싶어하는 그의 열정은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준비 탕!’이다. 출발지가 한국이었으니 시차적응도 필요없으렷다.

하이드파크에서 아치볼드 분수대를 한참 감상하더니 드디어 렌즈를 만진다. 360도를 조금씩 조금씩 돌며, 멀리 또 가까이서 쉼 없이 셔터를 누른다. 마치 이 순간이 지나면 분수대가 없어지기라도 하는 듯, 담고 싶은 만큼 충분한 시간을 보낸다. 물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는 것. 드디어 카메라가 손에서 놓여지고 다시 한 번 전체를 바라본 후에야 몸을 돌린다. 그제야 아름드리 큰 나무들로 이루어진 초록터널이 눈에 들어오나보다. 시내 한 복판에서의 거대한 숲 속 느낌에 감탄하며 또 손이 바빠진다. 덩달아 나도 고개 들어 감상하다보니 나무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하늘이 마치 초록 옷에 매달린 반짝이는 단추같아 보여 다음 글쓰기 첫 문장으로 저장해 놓는다. 근처에 있는 세인트 메리 대성당 안에서는 플래시만 사용하지 않으면 사진찍기가 허용된다하니 바닥부터 천장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을 담는다. 덕분에 나는 긴 시간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 친구와 중학교 입학때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같이 했던 오십년도 넘는 시간들이 꿈결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러다 떠오른 바로 두 달 전의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양 생생하다. 그는 한국 방문 중인 나를 파주 헤이리예술마을로 데려갔었다. 수 십년간 아나운서였던 황인용씨가 틀어주는 클래식이 높은 천장의 카페 안을 채운다. 웅장한 음악 공간으로 다시금 빠져드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눈을 떠보니 어제는 서울에 있던 친구가 떡하니 내 앞에 서 있다. 맞다. 지금 우리는 같이 시드니에 있다. 오전 내내 땅에 발을 딛고 담은 모습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싶다면서, 그녀는 또 ‘준비 탕!’을 외친다.

우리는 309 m 높이의 시드니 타워로 올라가 하나의 드론이 된다. 해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하는 커다란 그림자로 인해 성당 지붕 위와 넓은 공원은 시시각각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또 다른 장관을 놓칠세라 카메라에 부지런히 담는다. 관람층에서 한 바퀴를 다 돌며 분주히 찍다가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가리킨다. 우리는 페리를 탔다. 파도가 어찌나 심한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 하다. 친구는 뱃머리에서 아찔함을 즐기며 특이한 장면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오히려 좋아한다. 20여분만에 도착한 맨리비치, 거친 파도 속에서 서핑하는 많은 무리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이끌리듯 해변가 물 가까이로 달려간다. 게다가 불그레한 석양까지 배경으로 또 그렇게 한참을 머물며 앵글을 조절한다. 멀찍이 떨어져 벤치에 앉은 나는 그 전체 모습을 한 장면으로 바라보며, 친구의 사진 작업을 통해 나의 글쓰기에서 부족한 부분을 찾아 보았다. 그것은 열정이었다. 어느 새 늦저녁 어둠이 밀려온다. 첫 날 일정은 그렇게 12시간만에야 막을 내렸다. 어떤 날은, 오페라하우스 계단 위에 자리잡고 앉아 몇 시간이고 건물 끝에 걸쳐진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 모양을 비스듬히 찍다가 아예 엎드려 찍다가를 반복했다. 그렇게 5박6일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그녀는 떠났다.

그 후 어느 날, 친구와의 추억이 떠올라 맨리비치를 다시 찾았다. 나는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한 입 베어물며 생각에 빠져 해변가를 걷고 있었다. 친구 대신 이번에는 ‘준비 탕!’하는 갈매기 한 마리가 등 뒷쪽에서 순식간에 내 손도 건드리지 않고 기술적으로 봉지 속 음식만 낚아채 길바닥에 떨어트리니 갈매기들이 떼로 몰려든다. 마치 지금의 내 모습 같아, 졸지에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만 손에 쥐고 갈매기 무리 속에서 빠져나왔다. 느닷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허탈감이 그 친구가 함께 없음을 더 실감나게 했다. 머물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음에랴. 바로 페리를 타고 오페라하우스 쪽으로 돌아왔다. 샌드위치 가게에 다시 들렀다. 이번엔 안전한 곳을 둘러 보다가 '갈매기 쫓기'를 전담하는 순찰 도는 훈련된 개를 발견했다. 오페라하우스 근처 식당 야외 테이블 위 음식을 낚아채고, 유유히 날아가는 불청객 갈매기들을 쫓기 위해 순찰견을 활용하여 이 문제에 대처하다니. 여러 방법 중 이 묘안은 성공적이라한다. 그 도둑 갈매기 한 마리가 나를 맨리비치 대신 오페라하우스 앞에 머물게 했으니 평화롭게 점심을 먹은 후, 친구와 몇 시간 함께 했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았다. 사진작업을 처음 지켜보며 ‘지금 그리고 여기'에 온전히 머물러야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으니 나의 글쓰기에도 적용해 본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모발폰에 새 글의 초안을 써서 저장했다.

친구는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지고 시드니에 나타나 ‘매 순간 현재에 머물기’를 몸으로 내게 보여주었다. 순간을 포착하는 갈매기와 무심히 지나치는 구름에서조차 찰나의 한 장면을 포착하려는 그녀의 열정에서 나의 안일했던 글쓰기를 돌아본다. 은퇴 후 요즘, 남은 에너지는 청춘 때와 같지 않지만, 언제 어디서나 글쓰기의 글감을 떠올릴 수 있으니 게으름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매월 첫 토요일의 ‘지금 그리고 여기’는 메도우뱅크에서 모이는 문학회이다.

차수희/수필가, 이효정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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