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중반인 대학 2년 때 배운 경제학에는 성장론(成長論)이란게 없었다. 잘 읽히던 이 분야 대학 교재로서는 기억하건대 최진호(?) 중앙대학 교수의 경제학개론이 있었다. 그때 대부분의 개론서들이 그랬듯 이 책도 일제 때 일본 대학 교육을 받은 학자가 저술한 것으로 수요공급의 법칙, 은행과 화폐금융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리카도의 지대론 같은 고전 경제학 이론이 전부였다.

성장론의 원조인 세기의 경제학자 케인즈(J. M. Keynes, 1983-1946)란 이름을 알게 된 건 4학년 때가 아닌가 싶다. 이른바 케인즈 경제학(Keynsian economics)의 요체는 국민총소득(GNP)이라는 파이를 키워 이에 참여한 구성원들이 나눠 갖는 몫을 늘려 잘 살게 한다는 것이다.

보릿 고개

경제발전에 사활을 걸어야 했고, 마침 미국에서 케인즈 경제학과 국제정치학을 공부해 돌아온 유학파들이 대거 영입된 박정희 정권에서는 이 성장론은 거의 국시가 되다시피 했다. 그리하여 관변 경제학자들은 가난을 나눌 수 없다며 정부의 성장제일주의를 무조건 옹호해왔다.

50-60년대의 ‘보릿 고개’ 시절이나 잿더미가 된 패전 후 일본이라면 먹고 사는 문제가 절대 우선이고 다른 건 그 뒤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단계가 지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99를 가진자가 100을 채우려고 한다는 우리 속담대로 인간의 소유욕은 무한이어서 파이가 늘어나면서 빈부의 격차와 다른 많은 사회문제 또한 늘어난다.

학문적으로 말하면 성장과 경제발전은 어느 단계까지는 몰라도 그후는 사회발전과 꼭 정(正)의 상관관계가 아니다. 케인즈 경제학은 이런 성장의 후유증, 특히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와 지구의 몸살을 전혀 고려에 넣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소비가 미덕

케인즈 경제의 또 다른 어쩌면 위험한 측면은 성장의 동력은 소비와 투자에 있다는 유효수요 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절약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많이 쓰고 많이 노는게 경제를 위하는 길이다. 그 결과가 자원의 고갈, 오염된 공기와 물, 처리하게 어렵게 늘어나는 쓰레기와 오물, 전례 없는 극심한 가뭄과 홍수 등 기후 변화로 수만명이 한꺼번에 죽는 재앙이 오고 있지 않나. 풍요속에서 빈곤과 좌절을 느끼는 소외 계층과 선거를 의식해 정부가 베푸는 선심으로 국가채무는 눈덩이처럼 늘어난다.

더욱 모든 나라가 살벌한 경쟁을 하는데 국민소득을 우리 만이 엿가락 늘리듯 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많이 쓰고 많이 팔려야 많이 벌 수 있는 재벌과 거기에서 광고 수입을 챙기는 대중미디어가 이 과소비와 과놀이문화를 부추긴다.

해외 거주자의 한 사람으로 볼 때 고국은 전부 미쳐있는 것 같다. 많이 벌어 많이 써야 하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야 하고 그게 빗나가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자가 많은 나라, 이게 온전한 사회일까. 이제 젊은 경제학도들은 판에 막은 돈과 물질뿐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사회를 분석에 넣고 하는 총괄 및 융합적 연구로 새로운 이론적 모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고국에 잠깐 와 있으면서 평소 내가 가졌던 이런 시각을 더 굳히게 되었다.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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