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로 6년만에야 한국에 잠깐 와 지내고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못해서일까. 서울 거리를 거닐며 쓰고 싶어지는 물 반 고기 반이듯, 사람 반 자동차 반의 자동차 산업에 얽힌 이야기다.

과거 회고로 돌아간다. 기억하건대 기사를 쓴 날짜가 아마도 1974년 봄이니 벌써 반세기 전이다. 고 한국일보사 장기영 사주의 지시에 따라 같은 한국일보 그룹사인 코리아타임스, 서울경제, 주간여성의 차장급 네 기자가 장차 한국의 거대 기간 산업이 될 현대조선(지금의 현대중공업)과 그 오너인 정주영 회장을 공동 취재하기 위하여 울산에 내려갔었다. 나는 위 영자 신문사의 경제부 차장이었다.

우리는 조선소 입구 가까이에 위치한 이 그룹 소유의 다이아몬드호탤에 머물면서 조석으로 우리를 만나 안내한 정회장과 자유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가 한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멍청한 놈이 곰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거대한 큰 시설에 50만 톤급이던가, 오일 탱커(원유 수송선) 20대인가를 처음으로 해외로부터 수주 한 게 전부인 초창기여서 전전긍긍 할 때였다.

자동차 한 대는 굴릴 수 있어야

그러나 여기 글의 주안점은 조선이 아니고 이 그룹의 왕회장으로 불리던 정주영씨의 결단에 따라 추진 되던 우리 나라 자동차 공업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와 서구사회에서는 신발에 비유되는 자동차가 우리 개인과 사회에 주는 기쁨과 고통을 먼저 말해야겠다. 정회장은 인터뷰 중 “사람이 나서 자동차 한대는 굴리고 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거름마 단계에 있던 시절이고, 장차 자동차 산업을 일으켜야 할 오너로서 당연이 할 소리다. 그리고 재벌의 임원들은 몰라도 언론인으로서는 잘나가던 한국일보의 정광모씨가 중학동 14번지 사옥 앞에 포니 차를 잠깐 세우고 내리거나 조중동 편집국장 일부가 테니스장에 그차를 타고 나타나면 눈길을 끌던 시절이 아닌가.

지금 한국의 자동차 산업과 자가용 소유자의 수는 어떤가?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자동차는 한국의 1등 효자 수출산업이 되었고, 한 집에 한 대는 옛 말이다. 서울과 주요 도시와 도로는 서두에서 말한대로 사람 반 자동차 반이다.

그러나 이 문명의 이기는 언제나 이기이고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걸까.

좁은 서울의 골목을 무심코 걷다 보면 차가 1미터 뒤에 바짝 와 있거나 옆에 지나갈 때는 깜짝 놀란다. 그 많은 고가 도로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Bumper to bumper) 달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와  공기 오염은 어떤가. 그러나 그건 약과다. 이 문명의 이기 때문에 이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저 세상에 떠나 보내고 슬피 눈물 흘리는 군상들을 생각해보라.

자동차를 만들지 말고 타지 말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남의 생명을 헌신짝처럼 여기며 이 신발을 살인마로 바꾸는 흉악범들을 철저히 단속하자는 말이다. 칼을 잘 쓰면 이기이고 아니면 흉기인 이치와 같다. 호주도 예외가 아니다. 운전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자는 말은 몇백번 되풀이 해도 지나칠 수 없다.

도요타와 브리티시 레일랜드

나는 한 때 상공 분야를 취재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 자동차 산업의 발전 과정을 좀 안다. 영국과 일본이 현대자동차의 성장을 많이 도왔다. 현대는 그 당시 필수였던 외자도입을 미국이 아닌 영국에 의존했었다. 그래서인지 현대자동차의 경영과 판매 전략은 영국의 간판급 자동차 회사인 British Leyland Motor Corp의 임원인 George Turnbull씨를 부사장으로 초빙 맡게 하였다. Turnbull씨는 한국은  적어도 25-30만대의 국내 시장을 기반으로 수출이 가능하다고 설파하고 다녔다.

그러나 제작 기술 면에서 현대는 일본의 도요타의 신세를 많이 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1969년 나고야에 있는 도요타 공장을 직접 가 봐 아는데  울산의 현대자동차의 제작 공정은 도요타의 모델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통계 자료에 따르면 작년 한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376만대, 글로벌 5위, 수출은204만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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