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 온천욕으로 휴식을 취하며 모리(Moree)에서 사흘을 보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떠나야 하는 것이 여행이다. 더 깊은 내륙으로 들어간다. 차창 밖으로 또다시 지평선이 펼쳐진다. 수백 킬로미터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운전했을 것이다. 문득 작은 동산 하나 볼 수 없는 평야가 대한민국 국토보다 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가능한가. 상상을 초월하는 호주 대륙이다.

도로변에는 목화 농장이 줄지어 있다. 
도로변에는 목화 농장이 줄지어 있다. 

도로변에는 하얀 목화송이가 즐비하다. 목화 농장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목화꽃 피는 계절이라면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이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목화꽃 피는 계절에 또 찾고 싶다. 기약할 수는 없지만.

오늘의 기착지는 부리와리나(Brewarrina)로 정했다. 작은 동네이지만 야영장이 있기 때문이다. 배가 출출해지기 시작하자 동네가 보인다. 그러나 동네가 너무 작다. 볼거리도 없다. 한 시간 정도 더 운전하면 제법 큰 보크(Bourke)라는 동네가 있다. 바나나로 허기를 달래면서 조금 더 운전하기로 한다. 일정이 없는 발길 닿는 대로 하는 여행이기에 가능하다.

보크라는 동네에 들어서자 야영장 표지판이 보인다. 적당한 크기의 분위기 좋은 야영장이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표정이 무척 밝고 친절한 젊은 여자가 반갑게 인사한다. 젊은 부부가 야영장을 운영하는 것이다. 도시의 삶을 등지고 오지에서 지내는 부부가 보기에 좋다. 도시의 복잡함과 경쟁에서 벗어난 삶,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마음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삶이다. 

오지의 작은 마을에서 배출한 세계적인 선수를 기억하는 공원.
오지의 작은 마을에서 배출한 세계적인 선수를 기억하는 공원.

다음 날 아침 일찍 동네를 걸어본다. 멀리 지평선 위로 아침 햇살이 눈 부시다. 개 짖는 소리도 들린다. 집마다 한두 마리 키우는 것 같다. 대부분의 집 마당은 정리되지 않아 어수선하다. 원주민들이 많이 사는 동네다. 우리들 눈으로 보면 원주민이 사는 집은 지저분하다. 별과 달을 벗삼아 넓은 대지에서 지내던 원주민에게 울타리를 만들어 지내는 서구식 삶을 강요한 덕분 아닐까?

낯선 동네에 오면 늘 하듯이 여행 안내소(Visitor Centre)를 찾아간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안내소는 현대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넓은 공터에는 범상하게 보이지 않는 조각품들도 설치되어 있다. 비치된 관광 전단을 몇 개 집어 든다. 직원에게 갈만한 곳을 알아보기도 한다. 

관광 안내소에서 소개한, 오래된 엔진을 시운전하는 장소에 가 보았다. 무게가 16톤이나 되는 디젤유를 사용하는 대형 엔진이다. 스팀엔진을 주로 사용하던 1920년 초 영국에서 제조한 것이다. 시드니에서 발전기로 사용했다는 설명도 있다.

영국에서 1920년대에 제조한 디젤 엔진
영국에서 1920년대에 제조한 디젤 엔진

조금 기다리니 작업복을 입은 직원 두 명이 엔진에 관해 설명한다. 듣는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3명뿐이다. 그러나 설명은 장황하다. 드디어 시운전한다. 큰 소리를 내며 꿈적할 것 같지 않은 육중한 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배기관을 통해 나오는 연기가 대단하다. 소리도 요란하다. 관광객을 위해 하루 한 번씩 시운전한다고 한다. 관광객을 위한 지방 정부의 노력이 엿보인다. 

엔진 소리를 뒤로하고 높이 뛰기 선수를 기념하는 공원에 들러본다. 퍼시 뮤럴(Percy Mural)이라는 들어보지 못한 선수다. 표지판에는 1962년 영연방 대회(Commonwealth Game)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라고 한다. 자기 집 마당에서 연습하여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다는 동네 주민이다. 원주민 출신으로는 최초의 금메달리스트라는 설명도 있다. 따라서 공원까지 조성해 자랑하는 것이다.

달링강(Darling River)에 서식하는 수많은 새.
달링강(Darling River)에 서식하는 수많은 새.

다음 날 아침에는 배를 타러 갔다. 관광객을 태우고 20여 년 동안 운영해온 배라고 한다. 생각보다 배가 크다. 고동을 울리며 천천히 물결을 헤치며 움직인다. 강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 달링강(Darling River)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달링강은 1,500km나 되는 길고 유명한 강이다.

배 난간에서 풍경을 사진에 담는다. 배가 다가가면 수많은 새가 떼를 지어 날아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옆에서도 중년 여자가 큼지막한 카메라를 들고 셔터 누르기에 바쁘다. 전문 사진사 같다는 나의 질문에 아니라고 한다. 단지 사진을 좋아한다고 한다. 센트럴 코스트(Central Coast)에 사는 사람이다. 집을 세주고 캐러밴으로 여행 중이라고 한다. 여행 정보를 비롯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빈곤한 나라에서 의료 활동을 했던 프레드의 묘.
빈곤한 나라에서 의료 활동을 했던 프레드의 묘.

이 동네에서는 공동묘지를 관광지로 소개하고 있다. 안내지를 읽어 본다. 공동묘지에 모셔진 유명한 사람들 이름이 적혀있다.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호주의 유명한 안과 의사 프레드 홀로우즈(Fred Hollows)가 이곳에 묻혀있는 것이다. 그는 세계 곳곳을 찾아가 안질환 예방과 치료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다.

무덤을 찾아갔다. 프레드의 무덤이라고 특별히 장식하지는 않았다. 큰 바위 하나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그 흔한 묘비명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헌화한 꽃이 많다. 지금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봉사하는 단체가 있다. 프레드가 주장했던 ‘모든 사람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하자’라는 좌우명을 마음에 새기고 봉사하는 사람들이 만든 기관이다. 호주의 유명한 사람이 이렇게 외진 동네에 쉬고 있다니, 생각 밖이다.

동네 한복판을 흐르는 강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동네 한복판을 흐르는 강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공동묘지는 넓게 조성되어 있다. 따라서 아직도 빈 자리가 많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빈자리도 없어질 것이다. 공동묘지를 걷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흔히 이야기하는 모멘토 모리 (Memento Mori)를 읊조린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은 죽음을 맞는다. 세상과 이별해야 하는 숙명이다. 세상을 향한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세상의 모든 짐은 주님께 맡기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언젠가 떠나야 할 세상에 속박되지 않은 삶을 그려본다.

사람들에게 강을 오르내리며 동네를 소개하는 관광선
사람들에게 강을 오르내리며 동네를 소개하는 관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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