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옆집은 공사 중이다. 어제와 오늘 철거 작업을 한다. 집이 지어 진지 족히 70년이 넘었다. 그 동안의 대부분을 살며 지켜왔던 노부부는 세상을 떠났고, 이리 저리 소유권이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개발자 손에 들어갔다. 사고 허물고 짓고 팔아 이익을 남기려 한다. 그 목적 하에 이 땅의 모습은 계속 바뀐다. 내년 7월에 어떤 모양의 집이 들어 설지 대단히 궁금하다

지난 주 The Sculpture by the Sea를 보러 갔다. 타마라마 비치를 바라보는 길가에 무료 주차공간이 하나 있었다. 복권 맞은 기분으로 신나게 세우고 해변 산책로에 들어섰다. 많은 조각 작품들이 있었으나, 나에겐 계획이 있었다. 본다이와 타마라마 비치의 경계에 위치한 한 집을 확인하고 싶었다. 보행자들의 눈 높이보다 두 길 높은 땅에 지은 집이라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1,100 제곱미터 땅에 1924년 지은 방갈로다. 1959년에 한번 매매가 된 후, 한 부부가 4자녀를 키우며 살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니 매물로 내 놨고, 지난 5월에 4천 5백만불에 팔렸다. 우리 옆집과 땅 크기나, 소유 역사는 비슷한데, 값 차이는 비교 불가다. 그 땅에 어떤 집이 지어질 지 정말 궁금하다  

2.

지난 주 콩코드 로드 뒷골목에 차 세울 곳을 찾아 들어갔다. 길 바닥에 한 새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 옆에는 또 한 새가 껑충대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죽어가는 새끼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는 어미 새인 줄 알았다. 주차하며 다시 돌아보니, 덩치 큰 까마귀가 죽어가는 까치를 긴 부리로 콕콕 찍고 있다. 산 것이 더 잘 살기 위해 죽어가는 것을 섭취하고 있었다. 

인간은 새 보다 위대하지만 여전히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산다. 그런데 억울한 것은 태생의 불공정함이다. 시작점이 다르다. 어떤 이는 해변가 집을 물려받고, 어떤 이는 산속 오두막에서 살고, 어떤 이는 그 마저도 없다. 어떤 이는 가문과 두뇌와 용모가 매우 스마트하게 태어나지만, 어떤 자는 전혀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의 먹이가 되어 산다. 왜 이런 모순이 존재할까? 누구는 까마귀로 살고, 누구는 까치로 살아가야만 하는가. 누구 책임인가?

3. 

집에서 올림픽파크 쪽으로 가는 샛길. 준 공장지대인데 두 그루의 자카란다 나무가 서 있다. 바로 길 옆이라 바닥부터 위까지 한 눈에 나무의 거대한 자태가 다 보인다. 아름답고 당당했다. 왕의 색으로 몸을 두른 나무는 고귀하기까지 했다. 영화 The Lord of the Rings 3편에 나오는 ‘왕의 나무 The Tree of the King’가 즉각적으로 떠 올랐다. 인간계를 멸망시키려는 괴물 오르크가 최후 전쟁을 일으키는 때, 초라하게 남겨진 인간들은 마지막 보루인 곤도르 성에 모인다. 그 성 중앙에 서 있는 나무는 잎이 다 떨어져서 창백하고 앙상하다. 스러져가는 인간계의 운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그 상태로 끝나지 않는다. 그 버려진 나무에 생명의 잎이 돋아나고, 무수한 나비가 깃들게 된다. 남은 자들은 그 나무 밑에서 승전과 더불어 결혼 축제를 벌인다. 극적 반전의 이유는 왕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3편의 소제목은 ‘왕의 귀환’이다. 

옆집을 산 개발업자가 한 첫 번 일은, 뒤 뜰에 있던 거대한 나무 3그루를 잘라낸 일이었다. 맹고나무, 대추야자나무, 레몬 나무가 잘려 나갔다. 파내고 자르고 버리는 과정에서 굉음과 먼지가 온 땅을 덮었었다. 그것이 현대 문명의 속성이다. 더 좋은 것을 만든다며 현재의 아름다운 것을 파괴한다. 그러나 때가 온다. 오늘의 비천한 것과 버려진 것들을 살리고 보존하여, 온전케 만드는 그 날이 온다. 왕이 귀환하시는 날이다. 그 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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