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어둠이 내리면 도시의 빌딩 숲에서 쏟아져 나오는 휘황한 불빛이 눈을 시리게 만든다. 오랜 시간 동안 이미 익숙해진 풍경이지만 매일 새롭게 느껴지는 우리 동네의 야경이다. 하루의 마무리를 확인하는 시간의 신호처럼 여겨진다. 나이가 들어감에 대한 두려움 탓인지 아니면 시간이 지날수록 막연함에 기대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느 여류시인은 “여자는 나이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불행한 것이라고, 그래서 나이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고, 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지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지나야 완전한 성숙함을 나타낼 수 있을는지 궁금해진다. 아직도 도전하고 싶은 의욕, 성취하고 싶은 욕망이 갈등을 만들기는 하지만 의식이 살아있으니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것을 소망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따스함을 안개처럼 내 주위로 흩날리고 싶은 마음이 피어오르는 요즘의 일상이다. 

그림 그리는 일에 자신의 여생을 보내고 싶은 친구와 함께 마운트 탬버린에 있는 예술의 마을을 찾은 적이 있다. 산 입구에서 마을까지의 길은 내가 찾아가는 곳이얼마나 아름다운 장소인지를 눈으로 냄새로 느끼게 해주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시원스럽게 뚫린 도로는 아~ 하는 소리를 내뱉게 하고 열린 차창 사이로 산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의 정기가 온몸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산속에서 호흡하는 진한 솔잎 향은 도시의 쌓인 먼지를 묻힌 채 산을 오르는 나에게 몸과 마음을 정화 시켜주는 듯했다. 점차 산이 겹쳐지면서 눈 아래 동네가 시야에서 멀어지고 숲 길가에 나타나는 집들은 마치 스위스 산장의 어느 마을에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Welcome to Village”라는 나무 팻말을 보며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름다운 카페와 아트갤러리, 독일산 뻐꾸기시계 집, 깊은 산에서 흘러나온 정갈한 물로 빚어낸 와인 전시장이 있고, 아기자기한 작은 소품을 파는 가게들, 모두가 나름의 개성을 뽐내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름다운 경치도 배고픔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하기에 가장 멋스럽게 보이는 베란다를 가진 카페를 선택해서 파스타를 주문해서 먹었다. 그 맛은 산속의 풍광이 주는 신선한 매력 탓인지 그냥 맛있다는 말 외에는 어떤 묘사도 할 수가 없었다. 가족과 함께 소풍을 나온 듯한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세상의 행복이 다 담겨있는 듯한 여유와 느긋함이 보였다. 

유난히 산을 좋아하는 친구는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여생을 산의 한 모퉁이를 보금자리 삼아 살고 싶다는 희망 사항을 가지고 있다. 작은 갤러리를 마련해서 자신의 그림을 걸어놓고 오가는 길손에게 관람시키면서, 한 잔의 차와 비스킷을 제공하며 2불의 입장료만을 받겠다고 했다. 그렇게 모인 돈으로 다시 비스킷과 차를 사고, 그래도 돈이 조금 더 모이면 교회에 헌금도 하고, 또 불우한 이웃을 돕고 싶다는 밝은 소망을 품고 있는 멋진 사람이다. 그런 말을 하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친구의 모습에서 사람은 자연과 함께할 때 가장 순수해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부근에 있는 부동산 가게에 들어가서 매물로 나와 있는 갤러리와 주택을 사진으로 구경했다. 그중에서 가격과 외형이 꽤 괜찮아 보이는 집을 보여달라고 하니 마침 한 집이 비어있다는 반가운 말을 들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뚱뚱한 호주 아저씨는 골드코스트에서 개발하는 주택단지 프로젝트까지 보여주는 선심을 베풀어 주었다.

부동산 중개인의 안내로 찾아간 집은 산속에 있는 전형적인 하얀색의 팀버하우스이며 현관에는 청동색의 종과 갈색 도자기 판에 “Rose Cottage”라고 새겨진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턱 하니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둥근 공 모양의 유리 자재로 만든 디자인의 글라스 스튜디오가 뒤뜰에 자리하고, 그림을 걸 수 있는 마루방에는 우아하고 탐스러워 보이는 벽난로가 방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층 침실에는 윤이 나는 갈색의 마루가 길게 깔려있고 장미꽃 무늬가 새겨진 커턴 뒤로 정원이 보였다. 천장은 삼각형의 나무무늬로 장식되어있고 침실에 딸린 작은 베란다에 서니 산의 전경이 한눈에 담겨왔다. 

목욕탕에는 스파, 샤워실, 욕조가 황금빛 손잡이들로 장식되어있으며 창문은 뒤뜰에 있는 자목련 나무와 연결되어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물체와 살아있는 나무들이 서로 얽혀서 하나의 환상적인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말은 하지 않아도 마음은 벌써 하나로 뭉쳐진 듯 보였다. 너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글을 쓰고, 우리 서로 그렇게 어울리며 살아보자는 허망한 소망을 잠시 품어본 것 같았다. 나는 어린 소녀 시절부터 내 머릿속에서 짓든 나의 이상형인 집을 보게 되었다. 내가 꿈꾸어 왔던 나만의 집을 찾은 것이다. 이 층의 침실에서 한참 서성이다가 힘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리고 화가인 집주인이 백만장자라는 환상적인 말을 귀에 흘려들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길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오랜 시간의 운전에도 나는 피로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날 밤의 꿈길은 아주 편안하고 깊이 잠들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 주었다. 내가 꿈꾸어 왔던 예쁜 집이 더는 환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붙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많이 황홀했고 많이 행복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내 속에 숨겨져 있었으며 내 꿈이 스며든 집을 찾았고, 그곳에서 잠시라도 앉아 있는 행운을 누렸으니까. 그리고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 시간의 환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그리워하는 마음이 스멀대듯 솟아난다. 알게 모르게 지나치는 일상의 작은 스침 속에서도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살아가면서 작은 것에서도 기쁨을 찾고, 사소한 것에도 감사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작은 미소, 따뜻한 인사, 차 한 잔의 여유로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 삶에 색깔을 더해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념에 잠시 젖어 든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아름다운 것을 소망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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