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처소엔 다양한 나무들이 있다. 아름드리 유칼립투스를 비롯해서 목련, 꽃 사과, 귤, 매화, 꽃 단풍, 뽕나무, 플라타나스, 대나무 등등이다. 그 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은 바로 오죽(烏竹)이다. 이곳 시내와 산중에 오가다 보면 무더기 황죽(黃竹)은 가끔 볼 수가 있는데 오죽은 드물게 눈에 띈다. 헝클어지고 구부정한 황죽에 비해 오죽은 곧게 자라면서 그 결이 매우 단단해서 그 어떤 기개감이 느껴진다. 오죽을 더 좋아하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올해는 초봄에 갑자기 더위가 와서 계절의 감각에 혼란이 올 정도였는데 얼마전에 죽순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아직은 여름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마당 한 켠 울타리 근처 척박한 땅에서 지속되는 가뭄 속에서도 이곳저곳에서 죽순들이 씩씩하게 올라오고 있는 모습에서 그들의 강한 생명력을 엿볼 수가 있다. 일년에 단 한 번 그것도 한달 이내에 15m 정도 자라고 나서 성장을 멈추고 있다가 50년에서 70년 지내다가 단 한 번의 꽃을 피우고는 사라지는 특성을 갖고 있는 이 대나무는 이름 그대로 나무인지 식물인지 구글에 알아봤더니 식물이라는 이외의 답변을 들었다. 나무로 인정을 받으려면 몸체의 부피가 점점 켜져야 된다는데 대나무는 죽순이 올라올 때 그대로의 크기로 위로만 자라기 때문이란다. 그 결이 워낙 단단하다 보니 나무라는 이름을 붙여서 그의 체면을 살려준 듯하다. 나무인 듯 식물이고 식물인 듯 나무라 하니 전청조 만큼이나 그의 가름이 아리송하다. 그런 대나무 여서 인지 상당한 특징도 갖고 있다.

매란국죽(梅蘭菊竹)의 4군자(四君子)에 자주 등장하듯이 꼿꼿한 선비의 변함없는 지조에 비견된다. 그러면서도 속은 텅텅 비우는 무욕의 청렴성을 엿보게 하는 특성도 있다. 항상 푸른 잎과 탄탄한 뿌리로 인해 강한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외줄기의 높은 키도 그 특성에 더해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한 여러가지 상징성을 가진 대나무 중에서도 본인이 유독 관심을 갖는 것은 대나무 마디이다. 어릴 땐 마디 간격이 매우 좁다가 커질수록 그 간극이 점점 넓어진다. 줄자로 재어 보았더니 거의 1cm에서 2cm 정도였다. 마디는 생장의 기점이며 그 마디를 기반으로 또다른 성장을 도모한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고비고비 맺어진 인생의 그 마디는 어떻게 생겼으며 그 지점을 어떻게 바라보며 지금에 이르렀을까? 소년과 청년 등의 성장의 매듭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여러 유형의 육체적 정신적 고락을 느끼면서 여기까지 왔다. 마디 없는 대나무가 없듯이 고뇌를 겪지 않은 인생도 없다. 단지 그 마디 마디의 고비를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방향의 새로운 마디를 형성했는가에 따라서 지금에 이뤄진 최종의 그것에서 행, 불행의 분기점이 된다. 문제는 “오직 지금 여기”이다. 과거에 맺었던 여러 종류의 매듭도, 다가올 여러가지의 마디들도 함께 잊어버리자. 다만 오늘 이 시각에 주어진 찰나적 삶에 감사하며 마음을 모으자. 그러면 지나간 아픔의 마디와 다가올 불안한 상념의 매듭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산 고산 윤선도는 그의 시조 오우가(五友歌)에서 대나무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읊조렸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렇게 사계절 내내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비우면서 단단해진 대나무, 그 나무의 높은 키를 바라보면서 내 인생의 마음속 마디 마디를 응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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