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비행기 추락과 양창선 사건

구글에서 날짜를 찾아보니 1967년 4월 8일이였다. 당시 공군의 주력 수송기인 C-46 한대가 서울을 떠나 대구 기지를 향하던 중 판자집 밀집 지역인 서울 청구동 산중턱에 추락했었다. 탑승자 24명과 주민 56명이 사망하고 150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대형 참사였다.

초년병 기자였던 나는 회사의 명을 받아 취재차 사진 기자와 함께 급히 현장에 달려 갔다. 사방 200여 미터 넓이 잿더미가 된 사고 현장은 물론 폴리스라인이 처져 있어 일반인은 물론 기자들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모든 언론사에서 모여든 기자들은 결사적이었다. 못 들어오게 막는 경찰을 밀어붙이고 쑤시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보니 아직도 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아 한쪽 구석에서는 연기가 떠 오르고, 여기 저기 타버린 가옥  잿더미 속에 우뚝 서 있는 시커먼 마네킹 같은 건 죽은 시체였다. 어떤 기자들은 일부 넋이 나가 벌벌 떠는 죽다 살아난 주민들을 붇잡고 이것 저것 집요하게 묻는 것이었다. 

성격은 달라도 그 당시 언론의 취재와 관련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매몰되었던 광산 배수담당자 양창선씨의 구출 작전이다. 공교롭게 같은 해 8월이었다. 충남 청양군의 구봉산 광산에 매몰되어 있다가 박 대통령이 특사를 보내어 몇 주 동안 구출작전을 지휘할 만큼 미디어와 대중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사건의 하이라이트는 그가 군 헬기에 실려 여의도 비행장애 도착할 때 구름과 같이 모여든 기자들의 난장판 취재 경쟁이다. 

형사계 문을 따고 들어가는 직업

언론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많지 않은 시절이지만, 나는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 대형 사건 현장에서는 질서 유지가 먼저가 아닌가. 몇 시 간 후면 책임 기관인 치안국이나 경찰청이 사건의 전모를 발표할 텐데 왜들 기다리지 않고 그래야 했을까. 그 전에 나는 선배 신문 기자에 대한 좋지 않은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던 시절리다. 경찰 출입기자는 몰래 형사계 사무실 방문을 따고 들어가 비빌 서류를 빼온다든가 하는 류다.

이런 불미스럽게 들리는 기자직의 관례는 과거나 지금 기사의 질보다 특종이나 속보로 결판을 내려는 언론사 간의 과도한 경쟁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왜 나는 이런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가? 요즘 한국의 텔레비전을 보면 소관 관청이나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내용을 시간을 두어 잘 보도하면 되지 걸어 나오는 당사자 정치인이나 범죄 피의자의 몇 마디를 성급하게 듣겠다고 10여멍씩 녹음기를 들고 졸졸졸 따라다니는 기자들의 품위와 위상이 안타까워서다. 모두 잘못된 과거 우리 언론의 전통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 전 미국의 닉슨대통령을 하야시킨 일명 워터게이트나 나라를 뒤흔들 큰 폭로 작전이라면 몰라도 선진국 언론이라면 이런 식의 값 싼 속보 및 특종 경쟁 장면은 잘 못 본다. 물론 속보와 특종은 대개 폭로 저널리즘( Expose journalism)과 직결된다. 한국에서 그 많은 언론의 폭로에도 불구하고 문제 해결 없이 유야무야 끝나버리는 것도 그렇지만,  녹음기를 들고 쫒아다녀야 하는 취재 대상을 보면 별 볼일 없는 인물인 경우가 허다하다. 범죄 피의자의 경우는 대개 혐의를 부인하거나 인정한다면 유가족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는 게 전부다.

언필징 사회의 목타이라는 언론의 사명을 생각할 때 기자의 역할은 숭고하고 막중하다. 그 역할을 잘 하자면 발로 뛰는 취재와 함께 깊은 리서치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개 일일 단위로 일해야 하는 이들의 경우 후자 기능을 소홀이 할 수 있다. 그런 사정 때문이겠지만 근년 실제를 보면 텔레비전의 주요 시사 토론 시간을 기자가 아니라 교수가 대부분 독점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 또한 기자를 일부 사람들이 아직 쟁이, 기레기 등으로 부르듯 그 직업을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본다. 그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시켰으면 하는 동정적 입장에서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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