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의 호메로스가 나의 이상 이었다한 때는 야스퍼스 니체가 나의 친구였다거리의 걸인과 병자들의 표적이 되는 예수는 단지 나에겐 거리의 악사 일 뿐 원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는 하늘 집의 코알라가 되었다그러나 잠만 자는 것은 아니다하늘 집의 은둔자가 되어 가는 중은둔자에게 거리의 악사가 찾아 왔다 지난날 오만했던 나에게 꿈을 꾸게 만들어 주고 후회란 없음을 알게 해준 예수님있다면 그분을 잘 알아 보지 못한나의 불찰일 뿐 그러나 늦은 건 아니다그분이 내 안에 계시는 한 후회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서 엘리자벳(호주한인문인협
꽃 피는 나무 한 그루 뒤 뜰에서 겨울의 화기(花期)를 인도하고 있다 차화1*(茶花)야 너는 꽃이 맞느냐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데 겨울 내내 꽃동산 만드느라 춥고 지치지 않는가 자기를 동백이라고 불어도 된다고 여쭌다 바로 그 장기간 금고 당한 동백이라니 누가 이렇게 풍파를 겪은 동백을 정원에 심었을까 나의 영감(靈感)이 천송이 만발한 분홍꽃 위에 떨어져 파동을 일으킨다 강건하고 열기 넘치는 아름다운 동백의 사연 폭풍이 부는 골짜기에서 육체와 영혼이 함께 떨던 나날 추위 때문이 아니고 피와 죽음의 사이에서 참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참느
벼락맞은 것들은 다 단단했다 오촌 아지매의 소박맞은 한恨이햇살바늘 같은 따가운 시선들로자글자글 여물었다 울음도 말라 버린 가슴팍엔오월에도 성에꽃이 피고 시퍼런 젊음도 칼바람의 핏발 속에짓이겨졌다 쓰나미 같이 할퀴고 간 자리엔 통곡으로 물든 세월 한 필 널어 두고 주름 주름마다 박힌 삶의 고뇌 꽁꽁 동여매어 다시 다짐하는 한 생의 응어리 손영선(호주한인문인협회회원)
농가에서 태어나 농가로 시집가남편보다 더 많은 들일을 했던 정애,퍼주는 일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냐며손수 지은 농산물을 넘치도록 퍼주었는데안타깝게도 사십 줄에 치매에 걸려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오랜만에 찾은 친구 보는 둥 마는 둥마루에 올라온 닭이나 쫓다가 먼 산이나 보다가느닷없이 밥 달라 투정을 부리더니그럼 잘 있어 밥 잘 먹고눈물로 돌아서는 나를, 저기요 불러고무신 한 켤레를 찾아와 내게 내밀었다그것은 수년 전 내가 선물했던 것어찌된 일이었을까 십여 년이 지나서도 나는그 일, 어제 일처럼 궁금하고 눈물이 난다고무신을 신은 누
태초에 하나이던 대지가떨어져 남쪽으로 흘러온지수수만년 하늘이 달라서인가일그러진 내 모습나도 너도 하느님 지으신 자녀들 아닌가너는 내게서 사랑을 빼앗아 가고 증오만 남겼나 나의 허물은 땅을 사랑하고 바람을 사모한 것 뿐풀 한포기 훔치지 않았는데누구의 허락도 없이사랑하는 형제자매 친구까지도 죽인저들을 그냥 두시다니요 아 저 타스마니아 조상의 한을 다시는 서리지 않게하늘이시여 태양이시여 나를 다시 살게 하라살게 하라 서엘리자벳(호주한인문인협회회원)
세월 주워 염주를 꿴다 숱한 독백 구슬 속에 여울져 허무의 강 흐른다 강물 굽이굽이 시린기억 매만지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세찬 물살에 휩쓸려 허우적거린다 염주 한 토막 구겨진 번뇌처럼 술독에 피는 누룩처럼 혼자부글거리다 앓고 있다 다져놓은 입 다문 그늘 삼키다가 걸린 자투리 햇빛 진한 그리움으로 고여 내 행로에 만나는 어두운 동굴 속 뿌리 깊게 종유석이 자란다 손영선(호주한인문인협회 회원)
지금은 폐간된 GEO라는 잡지 98년 12월호에 작가 오정희의 이라는 글이 실린 적이 있었다. 이십 대는… 삼십 대는… 그런 식으로 되어 있었던 글인데 당시 이십 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던 나는 그 글에서 이십 대에 관련된 부분만 일기에 옮겨 적어놨었다. 그땐 나의 삼십 대나 사십 대 이후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때니까. 나중에 그 일기를 들춰보다가 오정희가 말한 삼십 대는 어땠을까, 또 그 이후는? 하는 생각에 그 글을 다시 찾아봤다. 잡지는 이미 폐간되어 찾을 수가 없었는데 다행히 그 글은
아버지 서거하신지 사십오년이 지났네요오늘같은 날엔 추억은 거스리지 않고그저 이렇게 말랑말랑한 문자로 아버지를 둘러 드리겠습니다고요한밤보슬비 사락사락아버지 얼굴이 훤히 보입니다아버지의 얼굴 많이 닮았다는 이 딸 보이시지요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주하고만 있어도 너무 좋으시죠바다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저의 생명 전부를 관통합니다호흡의 시작부터 멈출 때까지아버지는 내 혈맥에서 흐르고 있어요아버님께 축복 드리는 날축복 드립니다 아버지두달 후엔 친증조부로 진승하시는걸요환히 웃고 계시네요아버지가 너무 그리워이민 와서 처음 부활과 복제라는 단
호 박 덩굴에 매달려 길 떠난다 푸르고 싱싱했던 시간 훠이훠이 날려 보내고 때로는 더위에 시달리고 때로는 궂은비에 젖어 덩굴손 놓치면 나락(奈落)안간힘으로 부여잡지만 어딘들 만만한 세상 있겠는가 리듬이란 아무 때나 부서지는 것 이길 벗어나면 보일까 안개 젖은 울음 지천에 깔려 걸음걸음이 노역이다 이제 걸음은 천근으로 가라앉으니내 이름은 늙은 호박 손영선(호주한인문인협회 회원)
얼마 전, 내 서가를 둘러보던 지인이 자서전이나 위인에 관한 책은 좀 없느냐고 내게 물었다. 그런 책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데요, 라는 내 대답에 지인은 서가에 꽂힌 소설들을 쭉 가리키며 이건 다 가짜잖아, 진짜 있었던 일이 아니잖아, 라고 했다. 그 순간,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우물거리다 말았다. 사십 년 가까이 살았지만-어쩜 사십 년 밖에 안 살아서 그럴지도 모르지만-난 ‘진짜’라는 게 뭔지, ‘진실’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 진실은 거기까지가 아닐까. 우리는 그 ‘어떤
누가 찾아오나보다 이 꼭두새벽에 발자국소리 먹구름 궁시렁대며 시름시름 풀어놓은 하늘의 푸념 하루를 야금야금 베어 먹는 침묵의 어둠 긴 하품을 하는 사이 꽃피우던 자궁이 느닷없이 조산을 하고 골목마다 무연한 슬픔이 버섯처럼 피고 있다 지친 시간의 관절마다 울음 몇 말 퍼질러놓은 폐사지 손영선(호주한인문인협회회원)
새벽, 계절의 불평을 들으며 눈을 뜬다. 그러고 보니 잠을 깨운 것도 빗소리였고 잠을 설친 것도 밤새도록 좌-악 좌-악 내렸던 빗소리 때문이었다. 창밖엔 지붕의 윤곽들, 들리는 소음들, 기차 지나가는 소리, 자동차의 빗속 질주, 앞 건물의 창문 불빛이 하나씩 늘어간다. 엇 저녁, 딸의 전화를 받은 건 10시쯤이었다. 딸의 목소리는 조금 지쳐 있었다. 딸의 전화가 반갑다. 신경 쓸 일이 아닌 소식을 담담히 기다린다. 딸은 시카고 업무에서 오늘 아침에 돌아왔고 이번 주말은 파리에서 하루를 보낸 후, 맡겨진 근무를 위해 월요일과 화요일을
바다 건너 호주에 간 미미의 남편 준이는, 예전 같지 않게 자주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곤 했다, 증거도 충분하다 그땐 전화 비용이 비싸서 주요 통신 수단은 편지였으니. 이 편지에는 "여기는 천국이야, 나는 지금 왕새우 몇개 튀김해 놓고, 물 만두 빚어서 시원한 맥주 마시고 있어, 인간 천국에서 말이야... "흰 와이셔츠 며칠 입어도 그냥 하얗다든가, 호주 정부는 진정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든가(*1) 글 쓰기 싫어하는 준이는 꽁꽁 다져 세 페이지나 채웠다. 그 후 얼마 안 지나 다음 편지에는 백 팔십도 돌아서서, "지옥이야, 나
첫눈에 반하여 무어라 말할 것도 망설 일 필요도 없었다. 말로 들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매력이 있었다. 집을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었는데. 분홍꽃이 만발한 나무들이 양 옆으로 열을 지어있는 오솔길이었다. 20미터 정도 끝에 운치있게도 100살 아니 200살은 돼 보이는 유칼립투스(eucalyptus)가 있었고 바로, 그 옆 자리에 아담한 집 한 채가 보였다. 화려하고 밝은 꽃길과는 반대로 고통에 지친 애기의 울음같은 소리도 들렸다. 까마귀가 고목에 앉아 있었다. 여름이 아니라도 사계절이 있다는 자체가 민
고산자 김정호의 발바닥은어디서 쉬고 있을까 크레바스* 밑에서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빙하기를 지나온 신음은 미세하다아픔은 표류하고태풍의 눈같은 백발백중 침에도사라지지 않는다 하루 종일 서있는 사람나는 카페를 열고 카페는 새벽을 연다커피 머신이 원두의 무게로 쿨럭거리면째깍거리던 초침은 숨이 차고발바닥에선 불이 난다아픈 팔은 주무르고 어깨는 연민으로 다독거려도힘줄이 늘어지고 찢어진 발바닥에눈길 한번 안준 나 용암처럼 분출한 분노생명의 구멍마다 화산재로 틀어막고발바닥 뼈까지 스며든다의사가 하얀 가운을 입자문을 걸어 잠근 아픔은붕대를 감고 칼
나의 나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점점 멀리 도망한다 근사하게 가능성이라는 이름을 붙였지 공항에선 친구들이 울어 주었다 촌스럽게 지금쯤 그들은 나를 잊고 잠을 자겠지 푸른 별 사이로 구름을 날아 시드니로 간다 시드니 공항 앞엔 캥거루와 코알라가 뛰고 있을까? 애써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난다 밤이 새벽이 되는 불편하고도 정직한 시간 시간이란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 내 모든걸 조종하는 마치 생명체 같아 그 녀석에 붙들리어 배가 고프고 졸음도 온다 두고 온 모든 것들은 시공 속에서 사라진다 공항을 빠져 나와 11월의 시드
뇌의 회로 빨간불 켜졌다 길 잃은 욕망한 땀 한 땀 갈증꽃 피웠다 자꾸만 출렁이고 싶은 맨살 맨살 그 녹녹한 살덩이 잠가둔 세상 연다 저 혼자 꿈틀거리는 푸른 근육 위 독수리 날개가 퍼덕이고, 신들린 뱀 대가리 꼿꼿한 위엄이며 검붉은 독거미눈초리, 여인의 허벅지에 핀 흑장미 암내, 뭇짐승 우글거린다 두발 달린 짐승의 허기가 만든 억겁 슬픔의 환생 짙푸른 살내 숨소리 거칠게 몰아쉬는 비틀거리는 빌딩숲 늑대의 눈을 가진 낮달이 대낮부터 먹이 찾아 컹 컹 울부짖는다 손영선(호주한인문인협회회원)
오전, 한가한 시간이다. 방금 청소를 끝냈고 커피도 마셨다. 메모 노트를 훑어보니 오늘 해야 하는 일이 세 가지 남았다. 주간지를 대충이라도 끝낼 것, 일기를 소설 체로 한 장 정도 채울 것, 쇼핑 하지 말 것, 어떤 일이 있어도 한 시간 걷고 스트레칭도 겸할 것 그리고 은행에 들러 입금 여부도 확인 이라고 적혀있다.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셋이 남았어, 중얼중얼, 대충 메모 노트를 뒤적이며 시간이 걸리겠다는 생각을 하며 노트를 덮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누구지? 수화기를 드니“ 언니 진희 얘요. 잘 지냈어요?” 조금 울림 있는 목
하지(夏至) 세상의 중심에서 열과 빛을 공급해 주는 자 오늘은 그이와 젤 가까이 하는 날 시드니 해변의 푸른 바닷물과나무 위에 고루 쏟아놓은 햇살그 찬란한 빛의 잔치 앞에무릎 꿇고 그 성대함을 앙시해도 과분치 않다 밀이 빵이 되는 까닭은 밝히지 않으리라따끈한 빵 냄새에 고향 떠난 나날이 감상된다.하짓날, 찹쌀 오그랑 동지 팥죽 냄새 분분하니거꾸로 간 시드니의 절기가 바람에 실려 간다. 양안전(호주 한인 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