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여년이 넘게 한 자리에서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던 우체국이 역 건너편으로  이전을 했다.  내가 이 동네에 자리를 잡기  훨씬 전부터 있었으니, 터줏 대감처럼 거의 한 세대는 이 우체국이 동네의 고유 지명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주차 공간을 찾거나 어느 장소를 물을 때도 우체국 부근에서 어느 쪽이라고 말하면 쉽게 알아 듣곤 했었다. 

이스트우드를 다녀 본 사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우편함을 열려고 하다가 갑작스레 우체국 벽에 붙은 노티스(공지)를 들여다 보니, 리스 계약이 끝나서 당분간 임시로 역 건너편으로 이사했고  새 장소가 구해지면 다시 알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새로 옮긴 우체국은 예전 우체국의 바깥 벽면을 따라 길게 우편함으로 빼곡 채웠던 것과는 확연히 달리, 키를 열어 내가 직접 꺼내지 못하고, 우체국 사무원을 통해 우편물을 픽업해야 한다. 실내가 협소하고 아직 제대로 갖춰진 장소를 찾질 못했으니, 예전 이런저런 사무용품과 전자 기기를 진열해 놓던 진열대도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오랜 기간을 들낙거리며 소소한 물건들을 사고 카드도 보내고 선물도 보낼 수 있던 익숙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낮설고 생소한 분위기에 마치 정든 고향 집이 완전 타향이 된 듯하다. 왠지 추억과 소유를 내 허락 없이 맘대로 처분 당한 것 같은 아쉬움이 크다. 

이 전엔 우체국 바로 옆에 큰 전자 제품 가게인 빙 리(Bing lee)가 있었다. 우편함에서 우편물들을 꺼내고는 으례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들르던 곳이다. 점심을 먹고 산책겸 들르면 족히 20-30분은 머무르며 새로 나온 TV도 냉장고도 보고 신형 컴퓨터며, 카메라에 커피머신과 여러 신상 가전 제품을 살펴 보는 재미를 만끽하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이런 저런 가전 제품도 사고 틈틈이 호기심을 만족하는 더 없는 취미 공간이 되었다. 그곳이 없어지고 다른 곳으로 이전을 했을 때도 내 고유의 놀이터를 예고없이 빼앗긴 어린 아이의 심통난 아쉬움이 적잖이 있었다.   

이번 주에는 지인이 이사를 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아파트에 살던 아들 가정도 길 건너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마치고 저녁에 공식처럼 짜장면을 먹으며, 아들은 이사를 하니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힘도 많이 들고 집을 움직이는게 쉽지 않다며 30대 사회 초년생의 푸념을 늘어 놓는다. 우리도 돌아보니, 특히 30대엔 여러군데를 이사해야 했었다. 

더구나 미국에 가서 살려고 살던 아파트도 처분하고 모든 살림살이를 팔고 갔다가 다시 그 곳 살림도 팔고 호주로 이사를 왔으니, 우리도 열 손가락으로 다 셀수 없을 만큼 많은 이사 경력이 있었다. 이사하는 현장을 보고6개월된 손자를 안고 이유식을 먹이는 아들 부부를 바라보니 “ 다 그런 시간이 인생에 자산이 되고 책임있는 가장으로 성장하게 되는 거야” 말하면서도 빨리 집도 사고 안정이 돼야 할텐데 하는  마음이 애처롭다. 

내심 내가 이사를 수도 없이 많이 해봤으니 애들은 좀 하지 않고 살면 좋겠는데.. 때로 우리는 이미 살면서 배우고 얻은 것들이 자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수가 된다면 얼마나 기가막힐까 하는 동화같은 생각을 해보곤 한다. 언어도, 지식도 성취와 실패와 시행착오의 경험도 이미 한번 겪어 봤으니 답습하지 않으면 좋을텐데하는 순진한 만화 같은 동경이다. 

하지만, 어제 양치질을 했으니, 화장을 했으니, 며칠전 수염을 깍았다고 오늘 건너 뛸 수 없는 것 처럼 신은 세대를 거듭해서 반복되는 때로 대안없는 야속한 순간들을 살게 하신다. 프랑스 작가 모파상은  "인생은 마치 등산을 하는 것과 같다. 오르는 동안 정상을 바라보며,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매일 산을 오르는 것처럼 지루하고 반복된 길이지만 정상을 바라보는 그 것 자체에 행복이 담겼다는 말이다. 

이번 주는 부활절이다. 무심하신 것 같은 신도 여러번 이사를 하셨다. 오래 전에 직접 이 땅에 이사와서 살고, 실제 죽어서 음부에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나서 다시 하늘로 거처를 옮기셨다. 그리고 이제 뭇 인생들도 감히 신과 함께 살수 있는 영원한 거처를 마련해 놓았다고 호언 장담하고 계시다. 더 이상 이사하지 않아도 되는 더 할 수 없는 동화같은 약속이다. 결코 내가 해 줄 수 없는 근사한 선물을 변변찮은 우리와 자녀들에게 이미 오래 전 준비해 놓고 계시다. 

버거운 인생들에게, 신의 고통을 기뻐하라는 역설의 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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