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과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 지낸 모세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세대들에게 토라의 여러 곳에서  ‘자유와 선택 ’의 원리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신명기11:26-27)” 

“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명기30:15,19)

자유의 상징-자유의 여신상
자유의 상징-자유의 여신상

1. 자유 의지

이런 모세의 지침에 대해서, 마이모니데스는 이 두 구절이 우리의 신앙에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증거라고 강조한다. 또한 이는 정치적인 선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개인과 국가적 선택의 연관성은 만약 사람이 자유롭다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탈무드는 신명기서가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자유로운 사회’를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런 면에서, 모세의 비젼은 상당히 정치적이다. 이는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것도 자신의 관심이나 품격유지를 위한 것도 아니다. 또한 국가적 영광이나 명성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의 말에서 명성이나 존경, 확장과 제국에 대한 열망을 발견할 수는 없다. 민족주의의 의도도 발견하기 어렵다. 모세는 그들이 위대하다는 것을 내세우기 보다, 오히려 그들이 불순종하고 12정탐꾼의 사건으로 죄를 짓고 40여년이나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해야하는 댓가를 치러야 했다고 책망했다. 모세는 선거로 뽑히는 인기 영합적인 그런 유형의 리더가 아니다. 

자유와 선택의 키
자유와 선택의 키

대신, 그는 ‘겸손’과 ‘책임’을 설파하는 리더였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자 하나님이 선택한 국가’ 라고 외쳤다. 애굽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구분된 사회와 제국이 아닌 그런 나라를 세우고 싶어했다.  그는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자유를 갈구했던 때로부터 백성들에게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 놀라운 운명의 길로 인도한 그 하나님께 신실하게  머물수 있는가?’를 지속적으로 질문해 왔다.  만약 “하나님이 철학적인 추출물이 아니라, 역사를 직접 쓰시고 시내산에서 임재함으로 맹세케한 주권자 하나님이심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실로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법과 정의 구현
법과 정의 구현

2. 자유 사회 

이 위대한 일은 그저 관례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의미의 위대함이다. 예를 들어 모든 권력과 부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면, 이 어느 것도 따로 분리될 수 없는 선택적 권한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모세가 지금까지 가르쳐 온 것들은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고아와 과부, 땅없는 레위족속과 이방 나그네들을 데려와 우리 가운데 함께 절기를 기뻐하고 안식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모세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를 창조하도록 명령받은 것이라고 외쳤다. 탈무드는 다음의 세가지를 모세가 강조한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첫번째가 “우리는 자유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은 우리의 것이다. 복과 저주와 선과 악이, 신실함과 불신앙이 모두 우리 앞에 있다.  그리고 결정은 자신의 몫이다.” 라고 모세는 강조했다. 자유가 이렇듯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완전한 국가적 차원에서 선명하게 정의된 적은 결코 없었다.  흔히 개인이 도덕적인 관점에서 선택을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담과 이브가 그랬고 가인이 그랬다. 그러나 이것을 국가 차원에서 말할 때는 아주 다른 새로운 의미가 된다.  과거에 숫자가 많았어도 패배를 경험하고 힘이 없어 항거할 수 없었던 것이 리더들의 잘못이라고 책임 전가하는 것에 대해서 모세는 운명은 모두의 손에 있다는 것을 그는 무겁게 지적하였다. 그는 책임을 모든 것의 중앙에 자리를 두었다. 만약 그들 고유의 운명을 배신하고 주위의 우상들을 좇으면 이방인들과 같이 될 것이고,  초강국들에 의해 다른 약소국가들처럼 휘둘리는 처지가 될 것이라는 권면이다. 

바로 왕 앞의 모세
바로 왕 앞의 모세

두번째는, 자유에는 공동체적인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다.  “온 이스라엘은 각자에게 책임이 있다(쉐브옷39a)” 는 랍비적 교훈이 있지만 이 역시 이미 토라에 명시되어 있다. 유대교에는 ‘위대한 사람’ 또는 ‘영웅과 영웅 숭배’라는 이론이 없지만 이스라엘의 운명은 이스라엘의 반응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곧 부족의 수장들과 장로와 관료들로서 그들이 부뚜막의 불쏘시개이고 저수지의 수문과 같다. 결국, 바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 언약의 백성은 다른 고대 세계의 국가들이나 현대의 세상처럼, 왕이나 법정, 황제나 우수한 각료들에 의해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것들은 도덕적 대리인으로 공공의 선을 위해 공통의 책임을 갖는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마이클 월쳐는 성경적 이스라엘이 가장 민주적이라고 평가한 것도 맥을 같이 한다. 

셋째는, 하나님 중심적 정치이다. 역사 학자 요세프스는 이것을 ‘신정주의’라고 불렀다. 이는 흔히 성직자나 제사자에 의해 주도되는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폄하시켜 왔다. 하지만, 랍비들은 이것이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한 국가” 라는 미주의 문구가 더 맞는 표현 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해 한다면, ‘신정국가’ 보다는 사람이 아닌 법에 의해 통치되는 ‘법치국가’라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강대국간의 전쟁
강대국간의 전쟁

3.  자유와 선택

토라의 이스라엘은 역사안에서 가장 처음으로 ‘자유 사회’를 창출한 예로 불린다. 이는 17세기에  모던 사회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종교적 전쟁을 일으켜 두렵게 했던 것에서 나온 ‘양심의 자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양심의 자유는 다른 종교적 믿음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에 중심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토라적 이스라엘이 제시하는 해답에 대한 문제는 다른 성향의 것이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어떻게 자유와 책임이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나누어 질 수 있는가?하는 공공의 의식에 더욱 초점이 있다.

자유와 종교 전쟁 
자유와 종교 전쟁 

이것은 통치자가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제한하는데 있다.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전쟁과 거창한 기념비를 세우는데 종과 인력을 동원하는 것을 제지하는 것이다. 역사학자인 액튼 경은 ‘성경의 이스라엘은 연방국가였고 정치적 권력 대신 인종과 신앙의 통일성과 물리적 압력이 아닌 자발적 언약에 의해 함께 연결된 나라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죄성의 통치자들에 대해 신적 통치의 모델로 쌓여 온 결과로 인해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주지하고 있다. 

탈무드는 모세의 율법의 근간은, 더 완전하게 보장된 개인의 도덕성과 자유를 통해, 더욱 공동체적 정의와 자비가 실현되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고 조언한다. 오늘도, 우리 현실 앞에 펼쳐진 ‘생사 화복’의 복 주머니는, 토라 안에 해답을 머금고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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