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동안 쏟아진 폭우로 이방 저방 천정에서 비가 새고, 베란다의 지붕이 조금씩 적시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시커먼 자국과 큰 구멍을 남기고 구멍 속 헹하니 벌어진 틈새로 보이는 두고 볼 수 없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저 비 샌 데를 때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보수를 시작했지만, 이곳 저곳 손 볼데가 눈에 띄고 하루 이틀이면 되겠지 했던 섣부른 판단과 달리 일주일이나 걸리는 준공사가 되었다.  

지붕에 올라 비샌 데를 찾아 고치고 천정도 뜯어내고 새로운 판넬을 붙이고, 이방 저방 화장실과 베란다, 창틀과 외벽, 비닐도 덮고 페인팅을 하다보니 온 집안이 공사판이 되었다. 정작 집주인은 공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무기술, 무용도 처지니, 저쪽 방 한군데 피난민처럼 피해 있다가, 멋쩍으면 이것저것, 거치는 것들은 창고로 보내고 창고에선 기와도 찾아보고 예전에 썼던 페인트 통을 찾아서 페인트 색도 확인 해 주는 ‘그나마 보조’ 역할을 자처해 나선다. 

창고의 진실 

오랜 만에 내려와 본 창고엔,  언젯 적부터 였는지 아이들이 어릴 때 여행을 가서 찍어 휘장으로 만든 가족 사진도 한 쪽 귀퉁이에 세워져 있고, 지금은 완전히 은퇴한 옛 파트너와 함께 쓰던 사무실용 탁자와 서류 꽂이와 자격증 액자들도 한 쪽 구석에 쌓여져 있다. 사무실을 옮길 때 전해 줘야지 하며 잊고 있던 것이 벌써 십수년이 지났다. 아이들이 자랄 때부터 쓰던 고풍 식탁도 두툼한 다리와 윗판이 분리된 채로 한물 간 옛 배우의 포스터처럼 한 쪽 구석으로 내몰렸다. 공부하느라 남겨둔 책들과 노트들도, 한 때 열심히 사두었던  음향 장비와 스피커 등에도 먼지가 쌓였다. 들여다 본지 오래된 창고의 물건들이  언제 이후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아스라한 옛 기억들을 소환하고 있다. 이미 수 십년된 고물들도 눈에 띄고 창고에는 이력을 머금은 수 많은 잔재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 즐비하다. 웃음을 머금게 하는 애틋한 기억도, 어렵고 힘든 순간들을 떠 올리게 하는 물건들도 짠한 잔상으로 남는다. 창고 속엔 집 주인의 어설픈 인생이 담겼다.      

대화

지붕과 천정을 수리하고 이곳 저곳 건물의 부실한 곳들을 고치고, 부식된 창들을 벗겨내고 돌아가며 페인트며, 전기 일들을 연결한 목수일들이 총괄해서 진행되었다. 한국에서부터 큰 건설일을 하다 이곳에 일찌감치 35년여 전에 정착한 나이가 지긋한 분이 지휘를 하며 구석구석 새 모습으로 변하는 걸 보니 안심이 된다.  초기엔 짜장면 집이 없어서 레드펀에 화교가 하는 개인집을 찾아가며 아쉬움을 달래고, 교민수도 얼마 되지 않아 식품점도 거의 없던 시절 애기도 할 수 있었다. 

방을 고치다 옛적 파일들을 보고 내가 했던 사역에도 참석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자식들도 다 커서 분가 하고 한적한 곳으로 이사해 둘만 살고 자신의 집은 오히려 고치지도 않는다고 나랑 비슷한 소리를 한다. 처음 만났지만 얘기를 하다보니 친근감이 생기고 내 집 수리만 잘 끝내려던 생각엔, 어느새 이국 땅에서 자식들 낳고 옆집에 함께 살아가는 이웃같은 동질감이 든다.  

새 모습

톨스토이는 단편 ‘대자’에서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신’으로 대변되는 대부를 만나 삶의 여정을 통해 악이 편만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때마다 신으로부터 한가지씩 지혜를 배우는 인생을 보여 주었다. 소설은 만난 사람들이 자신으로 인해 더 악한 사람이 되거나 선한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고, 자기 자신도 더 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탁자를 닦으려면 걸레를 빤 후에 닦아야  탁자가 깨끗해 질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비워야 타인의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공사는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천정도 창틀과 문들도 깨끗해 지고 외벽들도 페인트를 칠하니  새 모습이 되었다. 집안에 남아 있는 니스와 페인트 냄새가 오랫동안 수리를 미뤄왔던 묶은 때를 벗은 실감을 더한다. 비록 아직 고쳐야할 데가 많지만 그나마 조금 나아진 뿌듯함이 진하다. 다음 번 고칠 것이 있을 때면 또 얘기도 나누고, 집도 고치고 마음도 뿌듯할 것이다.  

창고엔 기억이 잠들어 있고 어설픈 삶의 흔적이 묻어 있지만, 아직 공사 중인 인생엔, 여전히 변화될 새 모습을 바라는, 소박한 소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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