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저곳 지방을 다니고 회의도 참석하는 분주한 한국 일정 가운데 틈이 나자 아내가 냉큼 남대문 시장을 가자며 부추긴다. 손주들 입힐 옷도 사고, 며느리가 주문한 것들도 챙기고 주변 사람들에게 줄 작은 선물을 사야하는 당위성 있는 목적이 설득 구실이었지만, 내심은 이리저리 느긋하게 돌아보기만 해도 즐거운 시장 구경이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나도 그다지 싫지 않은 이유는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좌판에 먹거리가 가득한 옛 시장의 어릴 적 기억이 들자 이내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엔 바로 옆 명동도 들리고, 근처에 아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도 가고, 코 흘리개 시절의 초등학교도 가 보자는 회기본능의 야심찬 계획도 세웠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잘 기억도 안나는 남대문 시장은 발을 들여 놓자 마자 즐비한 양쪽 상가마다 물건을 살피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이쪽 저쭉 오랜 이력이 뭍어나는 먹거리 상점들엔 호떡이며 어묵과 떡볶이, 만두와 순대를 사려고 긴 줄을 지어 순서를 기다린다. 

아내와는 실컷 돌아다니다가 옆에 보이는 커피 숍에서 만나기로 적절히 협상을 하고 사람이 분비는 만두와 도너스 가게 앞에 서니 입맛이 동한다. 수많은 사람이 여러종류의 만두 주문을 하고 국물도 달라하고, 설탕을 더 뿌려 달라하고, 주문을 취소하고 다른 봉지에 떡볶이를 대신 담아 달라고 해도, 여러 명의 수 십년 경력의 노련한 아주머니들은 귀찮은 기색, 피곤한 표정없이 당연히 그려러니 하며 그 요구를 쉽게 들어 준다. 그러면 따끈따끈 하고 푸짐한 만두와 설탕이 듬뿍 뿌려진 찹쌀 도너스를 봉지에 넘겨 받은 손님은 만족한 얼굴로 돈을 내고는 금새 다음 손님이 새 주문을 한다. 조금 더 줘도 조금 덜 받아도 괜찮다는 여유가 투정하는 조카들을 달래 듯 진심이 되어 손님의 마음에 와 닿는 듯 하다. 내 순서가 지나고 아직도 붐비는 그 가게 저편에는 어묵과 튀김을 사먹으러 오뎅과 국물, 튀김 대 앞에 사람들이 즐비하고 상점들은 내내 분주한 채 반나절이 지나고 있다. 수십년 만에 들른 이곳에서 아직도 아내는 손주들의 옷가지를 사고 나는 어릴적 기억을 더듬어 길거리 만두와 오뎅, 찹쌀 도너스의 맛을 소환 하고있다. 비가 오면 진흙 길이던 이 길엔 화려한 대리석은 아니지만 내실로 가득한 깨끗하고 편안한 거리가 되었다.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를 쓰던 목소리 대신 손님을 편안하게 해주는 여유로운 표정이 이 거리를 대신 하고 있다. 

아직도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장사 준비를 하고, 하루 종일 손님을 맞으며 수십년 살다보니 주인도 나이가 들고 찾아오는 손님도 나처럼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이곳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평생 돈을 벌어 자식들을 키우고 대학도 보내고 유학도 보냈을 것이다. 이제 어린 손주들도 생기고 버스를 타고 전철역의 상가를 오가며 바삐 일하고, 우리가 오가는 시내의 어디에 그들의 자녀가 살고 있을 것이다. 가난 했지만 이 세대에 함께 살아간 사람들로 인해서 지금의 한국이 되었고 다를 바 없이 인생을 살다보니 나이가 들고 삶에 진심이 담긴 여유가 찾아들었다.

커피 숍에 앉아, 아직도 따끈따끈한 봉지를 여니 김이 모락 모락나는 고기 만두와 설탕이 듬뿍 발린 찹쌀 도너스가 먹음직스럽다. 상인의 여유로운 진심이 와닿으니 더욱 마음이 편하다. 인색하지 않은 진심은 표정으로, 행동으로, 여유로 진실을 증명한다. 

아직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 남대문 시장은, 이 세대를 함께 살아온 나이든 우리의 얼굴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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