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지난 12월18일 부터 8일 동안, 흔히 ‘빛의 절기’라 불리는 하누카(수전절) 절기를 지내고 있다. 보통 11월 말이나 12월초이던 행사가 이번 해에는 기독교의 크리스마스와 거의 정확히 겹쳐, 더욱 ‘빛’으로 표현되는 유사한 절기를 동시에 축하하는 행사들이 여럿 열리고 있다. 며칠 전, 12월20(화)일에는 시드니의 대회당(The Great Synagogue)에서 기독교 기관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함께 그 행사의 의미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오늘은 행사의 소식을 전하고 수전절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성공하는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삶에는 성공 보다는 실망과 좌절의 스토리가 더 많다.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판단한다는 논리로 시작된 ‘상대적 비교’는 스스로를 더욱 빈곤과 상심의 깊은 우울로 빠뜨리곤 한다. 오늘은 모세의 이야기에서 성공의 비결을 찾아 보려고 한다. 1. 실패하는 탈무드의 리더이집트에서 시작한 모세의 사명은 처음엔 성공적으로 보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 했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적을 베풀게 했고 형 아론이 말이 어눌한 자신을 대신해 말하게 했다. 모세가 놀라운 이적을 행하
창세기의 첫 도입부의 이야기는 두가지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하나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이고, 다음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이다. 두 가지 다 특별한 종류의 실패에 관한 것이다. 1. 실패의 역사첫번 째 사건은,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은 이야기이다. 먹지말라한 열매를 따먹고, 부끄럽고 두려운 나머지 하나님만이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깊이 숨어들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디 있느냐?’고 찾을 때 그들은 벗은 것이 부끄러워 숨었다고 대답하고, 먹지 말라고 한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 묻자, 아담은 이브가 먹게 했다고 핑계를 댔고 이브
며칠 전 서울 이태원에서 할로인으로 십수만명의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 젊은 청년들이 156명이나 압사로 생명을 잃는 끔찍한 사건이 생겼다. 그 중엔 여성이 약80%가 되고, 대부분이 10-20 대 라고 한다. 세계가 발칵 뒤집혔고 대통령과 장관을 비롯한 주무처 관리들은 사건을 규명하고 보고하느라 매스컴에 등장하고, 어린 자녀들의 죽음에 안타까운 국민은 그들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곤두 세운다. 북한이 울릉도 부근에 전후 처음으로 NLL을 넘어 미사일을 쏘았다. 진정한 리더십이 필요한 위기의 순간이 되었다. 1. 예측된 리더 토
야곱을 흔히 약싹 빠르고, 거짓과 술수에 능한 세속적 인물이라고 판단하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야곱을 평가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그는 형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팥죽 한그릇으로 형의 마음을 빼앗고, 엄마인 리브가와 공모하여 에서인척 변장을 해 아버지 이삭을 속여, 대신 축복을 받고 외삼촌이 사는 먼 곳으로 도망을 친 인물이므로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하다. 1.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하지만 그는 누가 진정한 유대인의 아버지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아브라함과 이삭, 심지어 모세도 얻지 못한 색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그것은 유
다소 예상치 않게, 유명 랍비인 이삭과 리브가 부부가 그다지 가깝게 소통하며 지낸 것 같지 않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들의 관계가 아브라함과 사라, 또는 야곱과 라헬 부부와 같지 않았고, 그들은 문제가 있을 때 서슴없이 대화를 나눴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네치브는 리브가가 처음 이삭을 만날 때의 장면이 광야에서 오후에 묵상하는 모습이었고 리브가는 베일을 쓰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 장면에 대해서, 리브가는 스스로 두려움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그의 아내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공포심은 이때로부터 그녀의 마음에
지난 월요일, 유대인의 신년(5783년)이 시작 되었다. ‘로쉬 하샤나’로 불리는 신년은 또한 ‘욤 하민’이라고도 불리는 데 이 뜻은 ‘심판의 날’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새해가 사과나 석류와 같은 과일들을 꿀에 찍어 먹는데, 풍성하고도 즐거운 한해가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나타내는데, 이 때, 이들이 읽는 토라 포션은 ‘회개’에 관한 것이다(신명기 29, 30장). 이들은 풍성하고 달콤한 한 해를 맞이 하기 위해서 열흘 동안 쓴디 쓴 회개의 시간을보내야, 생명책에 기록 된다는 ‘대 속죄일’을 맞이하는 아이러니한 절기를
우리가 즐기는 홍콩 영화나 서부 영화의 주제는 대체로 ‘원수’ 갚는 일이다. 사람들은 원수를 갚고 복수하는 데 희열을 느끼고 의당 그런 결론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흥행의 중요 요소 이기도 하다. ‘복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원한을 속 시원히 푸는 자연스런 감정이다. 하지만, 1. ‘복수하지 말라’성경에서는 ‘복수’를 분명한 어조로 금하고 있다. 레위기19:18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또한 예수가 바
20세기 말 구 소련이 붕괴되고,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 시대가 끝나갈 때, 전 세계는 서구가 공유해 왔던 윤리가 이데올로기로 인해 상실되는 불안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결집된 윤리없는 사회는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개인주의는 점점 강해지고 사람들은 더 이상 공공의 선을 위해 열심을 내지 않았다. 공동체적 책임감은 뒷전이 되고 공공의 삶을 보호하는 힘의 결집엔 무관심하게 된 것이다. 1. 현대 유대인의 정체성구 소련 지역에 살던 현대 유대인 철학자들은 전체주의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것인지를 몸서리치게 알게 되었고, 그곳으
모세의 시대에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종으로 삼았었다. 극심한 노역을 강요하고 히브리인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태어나는 갓난 남아를 모두 강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을 내려 대량 학살을 시행하였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시점에 모세는 아무일도 일어 나지 않았던 듯,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 사람들의 환대에 빚을 진 것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신 23:7)”모세는 한편 출애굽을 하며, 유월절에
12세기의 추앙 받는 현자 마이모니데스는 토라에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명기 31:19)”고 한 모세의 말을 기초로 ‘모든 이스라엘 남성은 자신 스스로의 토라 두루마리를 써야한다’ 고 강조했다. 가령 부모로부터 토라 두루마리를 유산으로 받았다 하더라도, 마치 시내산에서 직접 토라를 받은 것처럼 자신의 것으로 써야 한다는 뜻이다. 모세는 여러 율법 가운데 이 조항을 마지막 것으로 남겼다. 그만큼 이스라엘
윤리적 관념에 엄격한 토라는 수 많은 율법의 규정으로 삶이 경직되고 자유를 억압당하는 일상이 되지 않을까하는 중압감을 갖게 한다. 하지만 탈무드는 세상의 시각과 달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인간의 사랑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그것이 신명기서에 담겨 있는 윤리의 기준이라고 강조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청사진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1. 사랑의 하나님“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
자식은 어느 부모에게나 소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애지 중지 키우는 아들이 패악한 경우, 탈무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엄격한 체벌 기준을 세워 두고 있다. 이는 현자들 사이에 율법의 원리와 적용 방식에 대해 상당한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그 안에는 율법에 대한 신의 의도와 사랑하는 아들의 죄라는 미묘한 관계 속에 어떤 정의를 실현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담겼다. 문제의 율법은 신명기에 담긴 다음의 구절들이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 지낸 모세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세대들에게 토라의 여러 곳에서 ‘자유와 선택 ’의 원리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신명기11:26-27)” “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명기30:15,19)1. 자유 의지이런 모세의 지침에
토라의 시작, 창세기에는 믿음의 조상들에게 이스라엘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을 갖게 될 것이라는 축복이 여러번 등장한다. 출애굽기 초반에도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말하고, 솔로몬도 선택된 백성은 위대하고 셀수 없는 숫자가 될 것이라고 노래했다. 선지자 호세아도 동일하게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여러 곳에 기록하고 있다. 1. 역설의 정체성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신명기 7: 7절에 “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
지난 주에 이어, 토라의 대표 정신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쉐마-들으라’ 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보고자 한다. 폴란드의 대대로 유명한 랍비 가문의 후손인 야곱 라이너는 선조의 뒤를 이어 ‘야곱의 집’이라는 주석을 썼는데, 그가 성전 패망의 애도일에 ‘듣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사람의 관점에서는 보는 것이 듣는 것보다 더 정확한 지식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사실, 듣는 것이 더 큰 힘이 있다. 보는 것은 형체의 외부를 인식하지만, 듣는 것은 내면의 것을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어리석은 수고를 한다고 판단하지만 이들의 전통적인 생각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양편의 얘기를 들어봐야 재판관이 제대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많은 것을 판단하지만 상대편의 검증된 정보없이 관습적인 오해로 편견을 갖곤 한다. 그 오해의 이유는 상대편의 입장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 토라의 원래 의미탈무드는 ‘토라는 근본적으로 영혼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라고 정의 한다. ‘이는 사회의 구속에 관한 것이고, 개인의
세기를 거슬러 자유를 표방하는 레게와 랩 등의 저항 정신을 담은 노래와 문화가 주목 받고 있다. 바야흐로 다양한 문화가 함께 공존하고 교류가 활발한 시대를 살고 있다. 60년대부터 시작해서 유대인들은 다른 종교와 문화 가운데로 향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유대교는 신비주의와 묵상가들과 시인과 철학자, 또 경건한 남녀 수도자들과 비져너리와 선지자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영적 각성과 갈망은 한편 거리감이 있고 타국적이며 또한 비 친밀감이 내재하고 있었다. 흔히 그렇듯, 가깝기 보다는 먼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다. 1.
요즘 랩에서, Hey Bro, Yo! 하는 가사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친한 친구나 가까운 사람에게 진짜 형제처럼 뗄 수 없을 만큼 막역한 사이라는 것을 의미 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신문지상에서 형제들끼리도 반목하는 분쟁은 사회 속에 비일비재하다. 탈무드는 형제를 업신 여기는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을 감행한 모세는 지척인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광야에서 40여년의 세월을 백성과 보내야 했다. 그리고 역할을 다하고 나이가 들어 다음 세대인 여호수아에게 리더십을 이양한다. 토라는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신명기31:7).” 고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전한 말을 기록하고 있다. 전임 리더로부터 조언과 축복을 받은 여호수아는 또한